명절 : 그간 여러 이유로 자주 보지 못했던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서 서로를 물어뜯는 날 (간혹 진짜 피를 보기도 한다)
매번 긴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어디 여행이나 가버려야지 하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다. 해외여행을 가자니 비싼 비행기표가 발목을 잡았고, 국내를 돌아다니자니 출발 전부터 교통체증 생각에 피곤함이 파도치듯 밀려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같이 놀아줄 사람도 없고 이번에는 친척들도 우르르 몰려온다는데 진퇴양난이 따로 없다. 힘든 사투가 될 것이다.
엄마는 음식을 준비하면서 중대한 발표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나도 준비하느라 고되고 다른 집들은 명절에는 차례 안 지내고 다 여행 떠난다는데··· 우리도 앞으로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리지 않을 거다." 할아버지 제삿날을 제외하고 명절에는 차례상을 차리지 않겠다고 친지들 앞에서 공표하겠다는 얘기였다. 난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일까 평소에는 하지 않는 튀김까지 한다고 부엌은 정신없어 보였다. 버리는 것을 경멸하는 아버지는 기름의 양이 많다며 버려질 것을 염려하여 잔소리를 해댓고 엄마는 부엌에서 나가라고 응수했다. 그 밖에도 온도는 적절하게 데워졌는지, 생새우를 사용할지 아니면 가공 새우를 사용할지 그리고 기름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작업으로 빵가루를 입힐지 말지까지. 많은 사공이 튀김 냄비 옆을 둘러싸고 한 마디씩 거들고 있었고 어린 조카까지 합세해 긴장감이 흘렀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지만 새우튀김은 새까맣게 타버리고 만다.
한창 음식 준비 중인 가운데 숙모와 삼촌이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촌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숙모가 말하길 집을 나서기 전에 삼촌과 숙모가 언제 출발하느냐를 가지고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고 그걸 지켜보던 사촌동생이 짜증을 내며 차에서 내려 버렸다는 것이다. 사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사촌 동생은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행님 진짜 돌아삐겠다. 엄마, 아빠 매일 싸워가지고, 고마 내가 확 죽어버리고 싶다." (매일 싸우는 것과 죽고 싶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뒤늦게라도 오겠다는 사촌동생은 끝내 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차례를 마치고 다 같이 밥을 먹는데 나는 제일 먼저 한 끼를 뚝딱하고 일어섰다. 보통 불편한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할 때 나는 먹는 속도가 빨라지곤 하는데 이 경우 매번 소화불량이 동반된다. 이렇게 불편하게 갈비찜을 먹을 봐에야 혼자 끓여먹는 라면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 친척이라 부르며 주변에 울타리를 친다. 때로는 울타리 밖의 남보다 못한 사이면서도 말이다.
할머니까지 오셔서 인지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지 않았다. 얼마 전 돌잔치를 한 사촌 여동생은 결혼한 게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빠야는 결혼 안 해?"하고 지껄였다. (넌 꼭 오랫동안 행복해라) 그 얘기를 듣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를 포함한 들개들이 나를 포위해왔다. 다들 평소에는 자기 먹고살기 바쁘면서 명절만 되면 이렇게 남 걱정에 적극적이신지 걱정과 조언마다 조금의 돈을 받는 조건이었다면 나름 쏠쏠한 수입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금 있자 결혼식 날짜를 잡아둔 사촌 여동생과 남편 될 사람이 인사차 같이 왔다. 차를 내오고 과일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다. 예상보다 분위기는 더 적적했고 사람들은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동물의 왕국' 얼룩말에 관심을 한번 가졌다가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염소에 한번 관심을 주었다가 불쑥 이야기에 개입하곤 했다. 결혼 준비는 다 되었는지, 같이 살게 될 집은 어떤지 그리고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등의 얘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코끼리도 3분 안에 쓰러트릴 수 있는 독이 묻은 표창이 사촌 동생과 그의 남편의 심장부에 날아와서 박혔다. 그것은 앞치마를 두른 '우리 엄마'라는 닌자가 날린 것으로 내용은 이리 하였다. "나이도 있으니 피임 같은 거 하지 말고 2세 계획에 집중해야겠다." (참고로 사촌동생은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고 남편 될 사람의 경우 앞자리가 달랐다.) 갑분싸 한 분위기를 뛰워보려고 사촌 동생은 결혼식 전에 살을 빼야 한다며 뱃살을 움켜쥐며 너스레를 떨었다. 슬픈 장면이었다.
모두들 떠나갔다.
남은 건 산처럼 쌓인 빨래와 설거지 거리 그리고 상처뿐.
우리는 이것을 명절이라 부른다.
_유병재의 농담집 블랙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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