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여 과장 한 명이 있다. 그녀는 대체로 출근은 9시에 맞추어서 하고 저녁 8시를 넘겨 퇴근한다. (정해진 업무 시간은 9 to 6이다) 그리고 남들 보라는 듯 늦은 퇴근의 흔적을 메일로 남겨 놓는다. 외국 파트너사가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급한 업무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남들은 가방을 싸지만 그녀는 법인카드를 들고 저녁을 먹으로 나간다. 그리고 1시간 후에야 사무실에 돌아온다. 그렇다고 복귀 후 일을 바로 하는 것도 아니다. 옆 사람하고 수다를 떨고 개인적인 전화 통화도 하다가 메일을 보내고 퇴근을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주말에도 중요치 않은 메일 회신에 열을 올린다. 사내에서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윗분들은 이런 그녀의 행동을 알고 있을까?
회식 때나 회의에서 가끔 사장님과 얘기할 기회가 있다. 대놓고 그녀를 칭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은 그녀에게로 가고 비난의 화살은 나머지 직원들 가슴에 날아와 박힌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고 회사를 생각하는 직원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주어진 일만 하려고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임해라"는 말이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고 있는 불판 위를 넘어온다. 밑에 직원들이 보기에는 여 과장은 일도 없는 데다 보여주기식 일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데 위로부터는 인정을 받으니 뒤에서는 입이 피노키오의 코처럼 튀어나올 수밖에.
사장님은 어떤 근거로 우리도 그녀처럼 일해주길 바라는 것일까. '내리막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_제현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괴로움을 투입하는 만큼 인정받는다. 실적이 숫자로 찍히는 영업직이 아니고서는 일의 성과를 정확히 측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혼자 책임지고 하는 일이 거의 없으니, 누구의 공인지 누구의 과인지를 정확히 따지는 것도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공동의 일에 들이는 각자의 몫은 그 성격이 제각각이라 하나의 잣대로 측정할 수도 없다. 서너 가지 서로 다른 업무가 더해져 하나의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질적으로 다른 각각의 업무에 한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러니 진짜 성과를 따지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하는 평가-보상의 기제가 작동하지 못한다. 등가교환을 하려면 가치를 측정해야 하는데, 성과의 가치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상황 변수가 작용하여 잘한 일에도 못한 일에도 핑계는 수만 가지다. 상황이 이러니 일의 결과를 따져서 '공정히' 보상하는 것은 시작부터 실패하기 십상이다. 결국 일의 아웃풋 output(성과)이 아니라 인풋 input(투입)을 따기게 된다. 쉽게 드러나는 일의 인풋은 버티고 앉아 있는 시간이요, 일에 들이는 '괴로움'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각종 눈치작전이 나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사보다 먼저 당당히 퇴근하는 것은 보통의 용기로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가방이나 겉옷을 의자에 걸쳐놓고 슬며시 퇴근하는 기술 같은 것이 널리 통용되곤 한다. 많이 일하고, 많이 괴로운 사람이 능력자로 인정받는다. 아니, 정확히는 많이 일한 것처럼 '보이고' 많이 괴로운 '티'를 내는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 보여주기 위해 쓸데없이 만들어내는 일이 난무한다. 일종의 군비경쟁인 셈이다.
매월 실적 그래프가 사무실 벽에 붙고 그 달의 영업왕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박수를 받는다. 영업사원들은 실적(성과)으로 평가받는다. 아무리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도 실적이 없으면 부장님에게 깨지기 십상이고 근무 태도가 좋지 않더라고 많은 실적을 이끌어 내면 일을 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영업이 아니다. 한 프로젝트를 여러 명이 함께하고 있어 개개인의 기여도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일을 하지만 각 업무의 성격과 대응방식도 다르다. 누구의 일이 더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위에서 말하는 등가교환은 '한 만큼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개개인의 성과를 하나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으니 오래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 주말에도 메일을 보내는 사람 그리고 싫은 거래처 회식과 경조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사람에게 공은 돌아간다. 예전에 퇴사자가 생겨 공백이 생겼을 때 사장님은 일부 야근이 잦은 직원에게 특별 보너스를 지급한 적이 있다. 대상자들 이름 아래에 '다들 개인 시간이 중요하지만 그런 시간까지도 회사에 투자해준 일부 직원에게 감사하다'라고 적혀있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모든 상황을 세세히 알 수 없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렇게 보이는 직원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뒷맛이 쓴 거는 어쩔 수 없나 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다. 이제라도 성과가 명확한 영업사원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나도 보여주기식 일을 하는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보아도 회사가 바뀔 거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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