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으로 간 남자들' (Sink or Swim)을 보고. 이 글은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할 정도는 아니니 편하게 읽어주길 바란다.
영화를 보고 화장실에 갔다. 몇 개 되지 않는 소변기 앞에 남자들이 줄을 서있었다. 급한 사람들은 긴 줄을 비집고 들어와 좌변기 앞에 서서 거사를 치르고 있기도 했다. 한 남자가 오줌을 싸며 친구에게 말했다. "하나같이 다들 우울한 사람들이 나와서 처음에는 너무 적적했어" 그렇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버리고 말 것 같은 중년 남자들 이야기다. 이들은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고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살아간다. 만성 우울증으로 삶에 의욕이 없는 남자, 매사 부정적이고 버럭 하는 성격 때문에 와이프와 별거하는 남자, 수영장에서 일을 하며 연애 한 번 제대로 한 적 없는 대머리 남자, 회사를 운영 중이지만 빚만 늘어나고 직원 월급도 주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인기 없는 아티스트까지 전부 루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중년 남성들이다.
각기 다른 개성과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수영장에 모여 수중발레를 배운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실 실력이 형편없어 처음에는 수중 발레라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유치원생들의 율동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러다가 호랑이 선생님을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국제대회에 참가해 금메달을 딴다는 드라마틱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반지하 방 느낌으로 우울하게 영화는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국가대표로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는 극적인 결과에 다소 억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가정과 직장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중년 남성들의 도전을 지켜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고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혼자 피식하고 웃기도 했더랬다.
나는 축 늘어진 어깨에 고개 숙이고 다니는 중년 남자들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게 만들어준 '수영장'이라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여기서 수영장은 단순히 운동만 하는 공간이 아니다. 사실 이들은 운동도 열심히 하지 않고 그저 물에 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매일 수영장으로 모여든다. 마땅히 갈 곳이 없기도 하겠지만 수영장은 이들이 유일하게 편히 숨 쉴 수 있고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몇 년째 직장을 못 구하고 있어요', '회사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직원 월급도 못주고 곧 파산 할거 같아', '와이프랑 별거 중이야', '여자를 사귀어보지 못했어'같은 아픔들을 서로 나눈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해결책을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효과라 해야 할까. 말하는 것만으로도 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국제대회라는 목표가 생기자 이들은 고된 훈련도 버텨낸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몸이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 마음과 정신도 덩달아 활력을 찾아가게 된다. 그간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비아냥을 듣고 흘려버렸지만 이제는 아닌 것을 아니다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는 마음의 근육도 생긴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을 때는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회사 사장과 치고 박기도 한다. 더 이상 이전의 쭈구리 중년 루저가 아닌 것이다.
요약하자면 '수영장'이라는 장소는 첫째 땀을 흘리는 신체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둘째 여러 사람이 모여 웃고 떠들 수 있는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셋째, 장기적인 목표 (국제대회)를 세우고 도전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큰 성공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프레임' 저자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한 강연에서 행복에 가까워지는 비법을 아래와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그렇다 수영장이 행복 선물세트이자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이다.
1.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뚝심 있게 추구하라
2. 땀을 흘리는 신체활동을 늘려라
3. 여행이야 말로 행복할 수 있는 최고의 비법이다.
4. 소유가 아닌 체험을 위한 소비를 하라
5. 행복한 사람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
6. 공간은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5년 동안 거르지 않고 수영을 하다 그만 어깨를 다쳐 수영을 못하고 있는 애석한 처지여서 그런지 더더욱 수영장이 그리운 여름이다. 여름엔 '아이스커피'보다 '수영장'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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