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본선 경기를 보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일으킬 수 있었고 꼭 이겼어야 하는 경기에 패배해서 인지 '경기를 보지 말고 그냥 잣어야 했어' 하는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주말이고 마침 무료입장 티켓이 있어서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는 아트페어를 보기 위해 온 가족이 길을 나섰다. 부모님을 모시고 길을 나설 때 운전을 험악하게 하거나 신호위반이라도 하게 되면 잔소리 퍼레이드에 시달리게 된다. 이날도 그랬다. 빌딩 주차장에 들어가면서 무리하게 중앙선을 침범하는 바람에 반대편에서 오는 차는 경적을 울려 됐다. 나는 속도를 내어 그 차 앞을 무리하게 지나갔다. 사고는 없었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될 수 도 있었다. 어머니는 과장된 리액션을 하는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굉장히 놀랐다는 듯 "어떻게 운전을 이따구로 하냐" "중앙선 침범을 하다가 사고가 날 경우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같은 무서운 말씀을 하시며 나에게 겁을 줬다. 나는 왜 그랬을까. 역시 평소 습관이라는 것은 의식하기도 전에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두더지 처럼 갑자기 불쑥 고개를 든다. 이러한 사건이 앞으로 가져올 나비효과는 불 보듯 뻔했다. 세 살 먹은 어린애를 밖에 내놓은 것처럼 운전할 때마다 조심해라는 잔소리를 들을 일만 남은 것이다.
본격적인 여름 날씨에 소지품이 짐이 될 것 같아 핸드폰과 혹시나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살까 하고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한 장 꺼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미리 말하자면 이 카드를 두 시간 동안 꺼낼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그림 가격이 상상을 초월해서 인데 웬만큼 사이즈가 있는 것들은 천만 원은 거뜬히 넘었고 상대적으로 작은 것들도 100만 원 이하는 찾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작품을 먼저 휙 훑어보고는 오른쪽 하단에 있는 가격표로 눈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삼성 비자금 수사 당시 에버랜드 미술관에서 리히텐슈타인의 ‘행복의 눈물’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아마 가격이 억 단위였더랬지.) 아버지는 4살 손자의 손을 꽉 잡으셨다. 한창 호기심이 극에 달할 시기인지라 작품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는데 혹여나 파손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이 연출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작품 중에서는 이것이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디테일하게 표현된 작품들이 몇몇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 또한 그것이 제일 궁금해 보였다. 디테일은 실로 대단했다. 인물의 머리카락 이라던가 이마에 주름은 물론 아기 얼굴에 솜털 하나까지 상세히 표현하여 아래 설명을 보기까지는 그림인지 사진인지 사실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그러던 중 한 아주머니, 아저씨가 내가 보고있던 사과 그림 앞에 섰다. 두 분 역시 화제는 ‘이것이 사진인가? 그림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였는데 아주머니께서 몇 초의 망설임 없이 한 손으로 캔버스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격은 4,000만 원 넘었고 ‘만지지 마세요’ 스티커가 붙어 있는데도 말이다. 속으로 '저 아주머니는 돈이 아주 많아 저 정도는 껌값으로 여기는 것일까' '손으로 터치한 부분이 손상을 입는 다면 크기로 보아 대충 700만 원 정도는 배상해야 되지 않을까'하고 시답지 않은 생각을했다. 사실 나 또한 만져 보고 싶은 호기심은 가까스로 누르고 있었는데 너무나 쉽게 터치하는 아주머니의 패기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관람장을 나오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림이 하나 같이 비싸구나, 그냥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작품도 있기는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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