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동네 친구의 권유로 킥복싱을 같이 배우기 시작했다. 한창 혈기왕성할 때였고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어서 어깨에 힘을 좀 주고 다니려면 강해 질 필요가 있었다. 이전의 태권도도 한 친구의 권유로 동네 친구들 여럿이 몰려가서 배웠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주체적인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태권도보다는 더 강하고 실전에 쓸모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킥복싱으로 갈아탔던 걸로 기억한다. 킥복싱 체육관은 구청 뒤 도축장과 식육점이 즐비한 골목의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체육관까지 가려면 불쾌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빨간 조명의 식육점 골목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체육관을 가는 길에 가게 앞 매대 위에 놓인 돼지 머리를 보는 것은 예사였고 소머리부터 각종 도축 부속물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골목을 지날 때면 영화 속 주인공인 헝그리 복서가 된 거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체육관 건물에 들어서게 되면 시합 포스터가 벽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포스터의 인물들 중 체육관 사람들도 몇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교복을 갈아 입고 동네 오락실 앞에 모여 체육관을 가곤 했다. 모여서 다니길 좋아하는 친구는 여러 명의 친구들에게 같이 다닐 것을 권유했고 많을 때는 4, 5명이 같이 운동을 했었지만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줄넘기와 바닥에 그려놓은 발바닥 모양을 따라 스텝을 밟는 게 전부여서 몇몇은 한 두 달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운동을 좋아하고 곧잘 따라 하는 나와 친구는 관장님이 가르쳐 주는 것 외에도 체육관 선배들이 운동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며 흉내 냈다. 한 번은 둘이서 스파링을 했는데 난생처음 그 친구 덕에 별을 보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땀에 흠뻑 젖어 운동할 때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이나 복싱 미트를 칠 때 나는 마찰음이 듣기 좋았고 실력이 향상될수록 그 마찰음은 더 리듬감 있게 바뀌어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꽤나 체육관을 열심히 다녔고 때로는 다른 체육관으로 옮겨 운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시기에는 시들해져 그만두기도 했지만 그 마찰음 소리에 매료되어 아파트 옥상에 샌드백을 걸어놓고 혼자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연습을 하기도 했다.
오늘 메이웨더와 맥그리거의 시합을 보고 있자니 벌써 옛날이 되어버린 나의 나름 뜨거웠던 학창 시절의 파편들이 여기저기 떠다닌다. 사내들의 세계에서 더 강해지기 위해 혼자 묵묵히 애썼던 그 시절이.
"왼팔을 쭉 뻗어봐라."
"한 바퀴 돌아봐."
"네 주먹으로 그린 원이 너라는 인간의 크기다. 원 안에서 손이 닿은 만큼만 손을 뻗어야 다치지 않고 살 수 있지."
"그런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
"권투는 원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밖의 것을 쟁취하는 행위야. 원 밖엔 강적들이 우글우글해."
"적들이 원 안으로 치고 들어올 거다. 맞으면 아프고 때려도 괴롭다."
"그래도 할래?"
"원 안에 있으면 안전하데.."
(영화 "GO" 대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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