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글에서 이어집니다.
"윤아한텐 잘된 일이지. 걔 나이가 서른넷인데. 신랑을 또 얼마나 실하냐? 외모 착해요, 직업 완전 착해요. 신랑 직업? 너 몰라? 걔 신랑 의산잖아, 치과 의사." (중략) "우리 나이가 몇이냐. 이제 좀 있으면 마흔이야, 마흔. 우린 이제 결혼해도 애도 잘 안 생길걸?"
"당연하지. 야, 운이 좋아서 임신에 성공한다고 해도 정상적인 아이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 못 해. 서른다섯 넘으면 양수검사 하는 이유가 뭔데."
결혼이나 아이를 특별히 갈망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 덜컥 겁이 난다. 뭔가 엄청난 것을 놓친 것 같은, 대오에서 뒤처져 앞사람을 영영 따라잡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느낌.
남들은 다 한다는 결혼에 골인하지 못한다면 loser로 낙인찍힐 가능성이 현저히 커진다. 우린 가슴속에 이런 낙인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먼저 결혼에 성공한 사람들은 '안 해도 돼, 나를 봐, 얼마나 고생하며 사는지.'라며 위로로 과장한 무차별 사격을 감행한다. 우리는 순진하게 이런 얘기를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할까. 다수와 다른 길은 간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 낢은 생 동안 얼마나 많은 패배감에 더 젖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
"전 언어 쪽 전공했어요." 전공이 실용 영어학이라고 밝히면 사이버 대학 출신임을 눈치챌 것 같아 이렇게만 말했다. "그럼 영문학과 나오신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영문과가 아니라 실용영어학과예요. 전 H대 사이버 대학을 나왔거든요." 머뭇거리다가, 그냥 말해버렸다. 어차피 말할 거 추궁 끝에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럼 고등학교 졸업하고 회사 다니시다가...." 태환은 놀란 얼굴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이렇게 물었다. "원래 전문대 졸업했거든요. 회사 다니다가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이버 대학에 들어갔어요. 이제 됐나요?" 순간 테이블이 조용해졌다.
학력이라는 놈이 인생을 결정하고, 평생 이렇게 따라다니며 나를 엿 먹일 줄은 몰랐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늦은 뒤였다. 몇 개월 전 신입 사원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제일 먼저 손가락이 가리킨 곳도 졸업 학교란이었다. '나도 똑같은 학벌사회의 일원임을 자처한다. 지잡대에도 엄염히 서열이 존재하니까...' 작은 업체 인지라 대단한 학력 소유자가 지원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임원들은 서울 상위권 대학 졸업자 한 명이 지원한 사실을 가지고 꽤나 유세를 떨어 됐다. 취업란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아무 데나 이력서를 던져놓고 보던지 둘 중에 하나 일 것이다.
동생이 처음 집에 데려왔을 때부터, 나는 제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그는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대 로펌이라는 K법무법인을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서울대 나온 사위를 보게 되었다고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나는 그의 왜소한 몸집이나 겉멋이 잔뜩 든 말투, K법무법인 사무장이라는 직책이 마뜩잖았다. 정식 변호사도 아니고 겨우 사무장이라니. 사법고시에 합격할 때까지만 사무장 일을 할 거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 졸업하고 4년째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그가 고시에 패스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서울대, SKY 그리고 MBA는 모든 이의 선망의 대상이다.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것 들이지만 저러한 것들을 거쳐 의사가 되거나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다면 3대가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전문직 내부에서도 출신 성분에 따라 그 관계의 정도가 더 굳건해지기도 때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얼마나 고달픈가, 그 원 밖의 삶은. 우리는 이 굴레를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숨기고 있던 속 살 어딘가에는 숫자 등급이 매겨져 있는 것처럼, 영원히 숨기고 숨죽여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갈망하는 그것과 최대한 닿으려고 필사적일 것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말짱한 영혼은 가짜다." _손철주
"문턱 증후군- 즉 그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증상이죠. '어느 대학에 들어가면, 대기업에만 들어가면 됐어.' 저는 그런 생각은 인생을 개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인생은 몸으로 대답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순간적인 재치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요." 박웅현
우리가 어느 좋은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또는 좋은 상대와 결혼했다고 해서 인생을 잘 사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인생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서로 어느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본래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다. 문턱을 넘었다고 좋아할 필요도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묵묵히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슬픔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잊지 말자 세상에 말짱한 영혼은 없다.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존재한다면 그 영혼은 가짜일 테니까. 우리 인생은 원래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 아닐까. 주눅 들지 말자.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사랑하자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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