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재미없는 책을 연거푸 읽어서 인지 지독한 가뭄처럼 쩍쩍 갈라지고 푸석푸석해짐을 느꼈다.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소설이 필요했다. 도서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연한 녹색 표지의 '잠실동 사람들'을 발견했다. 표지 그림도 봐줄 만하다. 읽은 만한 책인가 검증을 위해 첫 장을 폈다. '오예~!'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첫 장부터 야한 장면 묘사로 시작된다. 이런 책은 읽어야 한다. 꼭.
겨울의 절정에서 이런 갈증은 또 찾아왔다. 이전에 '잠실동 사람들'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도서관 컴퓨터에 앉아 동일 작가의 다른 책을 빠르게 검색해 나간다. '모던 하트'라는 제목의 책이 보였고 다행히 소장 중이었다. 책 표지는 형편없다. 표지만 보고 책을 구매한다면 손이 절대 가지 않았으리라. 제목의 글자체 또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잠실동 사람들은 2015년에 모던 하트는 2년 이른 2013년도에 세상에 나왔다. 모던 하트는 '18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책 여기저기 박혀있었는데 '표지에나 조금 더 신경을 쓰지' 하는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13년도에 낸 책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 15년 작품 표지에 더 신경을 쓴 것인지 알 길이 없다.
37살의 미혼 여성 헤드헌터 이야기를 닮았는데 작가의 이력에 헤드헌터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상엔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것인가'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헤드헌터'가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집단인지 잘 몰랐었다. 종종 살아가면서 사냥용 총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은 사람은 여럿 만났지만... (사실 난 군대에서 꽤나 사격을 잘했었다.) 방으로 가는 길 거실에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전두환 회고록 허위 주장 가득해 판매가 금지되었으며 아직 까지 1,000억이 넘는 추징금이 남아있는데 납부 기한이 3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29만 원이 전 재산이라고 말하는 저 작자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은 밤이다.
이 책은 듣보잡 대학을 나온 미혼 여성의 이야기다. 시대가 바뀌어 공무원도 블라인드 채용으로 뽑는 다지만 정말 학력은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까. 제도가 바뀌었다고 수십 년간 뼛속까지 학벌의 위대함을 각인시켜온 우리들인데 그게 정말 가능은 한 일이까. 혼밥, 혼술, 혼영(혼자 영화) 그리고 혼여행 등 무수한 신조어가 탄생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쉴 새 없이 퍼 날라지지만 과연 눈치 보지 않고 클리어할 수 있는 것들인가. 용기를 내어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며 자신감 있는 워킹을 선보이지만 모자를 눌러쓴다거나 선글라스 안의 눈알은 바쁘게 주변을 스캔하고 있지 않은가.
'학벌'과 '결혼', 한국사회에서 나이를 어느 정도 먹게 되면 두 단어가 주는 무게감을 실감하며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 있으리라. 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학벌도 좋고 결혼까지 한 사람들을 보면 적개심을 느끼는 부류에 속한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여성이 어린 조카와 이웃집 아기를 봐주며 생각한다. 참고로 환장할 노릇이지만 저기서 말하는 윗집 아줌마의 아기는 이전 남자 친구(한섭)와 윗집 아줌마가 결혼해서 나은 아기이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 화제가 아줌마들과 비슷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세연의 아이를 봐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윗집 아줌마의 아이까지 봐주고 있다. 한섭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웃겨할까. 어디 가서 아무라도 붙잡고 결혼해버려야지, 정말 억울해서 못 살겠다.
역시 아파본 자만이 아픈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법, 미혼으로서 대한민국을 살아가기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 어디서나 처음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결혼 여부를 부지런히 그리고 쉽게도 물어 된다.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어디든 터진 입은 미사일을 물고 발사 대기 중이며 상처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걱정이 되어서..' 이런 말로 시작하지만 결코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없다.
서른일곱 아무리 되새겨도 늘 낯선 나이. 3년 뒤면 나는 마흔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마흔. 그때 나는 어떤 일상을 영위하고 있을까. 서치펌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여전히 싱글일까. 지금처럼 흐물 같은 남자나 만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하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작정 나이 먹기가 두려운 것. 그래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행해온 공고한 관습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이는 것. 차라리 차악을 택해 무시무시한 세월을 덮고 건너가는 것.
결혼을 아직 못했기에 게다가 나이 먹어가는 속도는 너무 빠르기에 크게 공감했던 부분이다. 세상을 바삐 살아왔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뭔가 했다고 할 수 없다. 그냥 별 노력 없이 나이만 먹어 온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관습이 생겨 난 것인가. 남들이 다 하니까 너도 나도 더 늦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 결혼인가. 이제 주변 또래들을 봐도 기혼의 수가 미혼의 그 수를 넘어 서기 시작했다. 얼마 전 친구의 쌍둥이 아기 돌잔치에 갔더랬다. 난 결혼을 해도 돌잔치는 죽어도 하지 않으리라 맘먹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돌잔치란 말인가. 돈을 잡으면 미래에 사장이 되고 청진기는 의사가 되며 마이크를 잡으면 연예계에 데뷔한다고 정말 믿는 것인가. 몇 달 전 결혼한 친구 녀석이 실실 쪼개면서 다가와 '결혼 안 하나'하고 말을 걸아 온다. '아.. 겉은 웃고 있지만 저 입을 째놓고 싶다. 듣자 하니 아기를 가지려 노력 중인 거 같은데 진심으로 늦게 들어서길 바랄게. 진심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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