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연차 휴가 날이다. 회사에서는 연차에 대해 업무에 지장이 없다면 휴가를 쓰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고 얘기하지만 '업무에 지장이 없는 한 '이라는 전제가 사실 굉장히 모호한 말이고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휴가라는 게 노동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이지만 결재 요청 시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주어진 연차를 다 쓰게 되면 마치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업무를 열심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회사 가는 날과 동일하게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일 것을 다짐하고 명령했지만 몸과 머리는 전날 저녁부터 '내일은 쉬는 날이야.' 하고 인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알람은 똑같은 시간에 울려되지만 한참 뒤에서야 좀비처럼 침대에서 기어 나온다. 동작은 굼뜨고 머릿속으로 오늘 정말 쉬는 날이 맞는지 되짚어 본다. '다른 사람들은 출근 준비로 한창이겠구나.' 차려놓은 아침을 먹고 회사를 가듯 집을 나선다. 연차 휴가라 하면 '오늘 뭐 할 거니?' 질문을 받거나 집안 잡일을 도맡아 할 가능성이 있어 가급적 요즘은 연차휴가를 발설하지 않고 조용히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회사에 몸이 묶여 있으면 돈을 쓸 시간과 일이 없는데 휴가날 나가서 시간을 보내면 당장 점심을 밖에서 해결해야 되고 조용한 장소에서 책이라도 보려면 커피를 사서 마셔야 한다. 그래서 '움직이면 돈이다.'라고 하나보다. 지금은 적을 두고 있는 회사라도 있어 큰 부담이 없고 연차라는 호사를 누리지만 백수가 된다면 더 짠돌이가 될 테고 제한이 많을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현관문을 나서 처음 간 곳을 집에서 멀지 않은 도서관이다. (대학 다닐 때는 교내 중앙도서관을 한 번도 제대로 이용한 적이 없다. 제대로 된 장학금 한번 받을 적이 없는 데다 비싼 등록금을 납부하고 남 좋은 일만 시켰다.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지만 책이 좋아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면 난 지금 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오전 9시 벌써부터 주차장은 만원이다. 언제나 일찍 와서 구석 자리를 선점하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후줄근한 복장에 모자를 쓰고 다리를 꼰 채 소설을 읽는 중년 아저씨 그리고 선반에 책을 정리하고 있는 직원까지 이제는 꽤나 익숙한 도서관 안 풍경이다. 바뀐 것이 있다면 한파 주의보로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11도로 뚝 떨어졌다는 것과 도서관 오는 길에 들었던 라디오에서 DJ가 '오늘은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린다는 문자가 많네요.'하고 말했다는 점 정도이다. 이 겨울도 곧 끝이 날 거라는 지점이 나는 서글펐다. 그 시간의 유속이.
책을 읽거나 새로 입고된 책과 월간지 코너를 기웃기웃하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다. '회사 사람들도 이제 밥을 먹겠구나.' 휴가 때 시간의 흐름은 나의 바람과는 역행하며 1.5배 즈음 빨리 가는 것 같다. 회사 생활을 꽤나 했고 비싸고 고급진 음식을 접해가는 횟수도 덩달아 늘어가면서 도서관 지하 매점의 값싸고 어설픈 음식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딱 그 가격만큼의 성격을 띨 음식들 앞에서 메뉴 선택 고민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렇다고 어느 정도 맛을 보장하는 라면만으로 허기를 채우기에는 나 자신한테 너무 푸대접하는 것 같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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