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만 불쌍하지, 돈 없는 게 죄지..' 따위의 말로 자위하며 차마 이들의 죽음을 가벼이 넘겨 버릴 수 없다. 타자의 가난이지만 잠시 슬퍼하고 다시 그저 나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너무 죄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왠지 내 것이 아닌 그 가난이 슬펐다.' _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지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하고 계시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두 분은 맞벌이를 하셨다. 자연스레 형과 나는 집에 남겨져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간혹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집에는 낮에도 엄마가 있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부러움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간혹 평소보다 늦어지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기도 했다. 방학이 되면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 형과 나는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내기도 했다.
'좋은 사회란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_오찬호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이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데 큰 관심이 없다. 이와 비슷한 아주 비극적인 사건이 터져도 그때 잠시 이슈가 될 뿐 사회적 제도가 개선되어 실효성을 거두는 일은 결코 없다. 배고픈 고통은 겪어 봐야 알 수 있다. 운 좋게 굶주림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은 그들의 아픔을 절대 헤아릴 수 없다. 이들이 마음 놓고 편히 일 할 수 있게 무상으로 애들을 맡길 수 있는 보호 시설이 존재했다면, 밖에서 자물쇠로 문을 잠그지 않아도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였다면,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돈을 많거나 적거나, 몸이 아프거나 아프지 않거나, 가족이 있거나 없거나 누구나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 지하셋방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은 친구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지금 나와 비슷한 나이 일 것이다. 나는 동시대에 태어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우리들의 죽음’, 27년 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28&aid=0002382176&sid1=001
[삶과 문화] 죽음의 진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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