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그 당시 아버지는 오래된 포도주 색상의 엘란트라를 몰았었다. 어느 주말 늦은 오후 시골에서 올라오시는 할아버지를 마중하러 시외버스 터미널로 나서는 길이었다. 지금은 리모델링과 증축 공사를 통해 터미널 주변은 정돈되고 그럴싸한 건물로 보이지만 그때만 해도 주변은 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국밥집이 즐비했고 오래된 터미널 건물을 촌스러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오고 갔다. 좌판에 물건을 꺼내놓고 파는 장사치도 많았다. 지금은 발권 시스템이 자동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목적지를 말하며 돈을 건네고 표를 끊는 행위가 다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할아버지는 보따리를 들고 버스에서 내리셨다. 부산에 올라오시면서 이것저것 아들네에게 줄 무언가를 싸오신 모양이었다. 그 시절에는 터미널 주변에는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편찮으셔서 경남 진주 소재의 병원을 찾아 x-ray도 찍고 검사를 하였지만 조금 더 큰 병원을 가보라고 하여 부산에 올라오시는 길이었던 것이다. 부산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무슨 생각이 하셨을까. 작은 병원에서 조금 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던 것은 무언가 마음의 준비를 해라는 뜻의 다른 말이었을 텐데. 그다음 날 인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고 결과가 나오는 날 어머니의 핸드폰으로 결과가 나왔는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암'이라고 했을 때 방문을 걸어 잠그고 꽤나 오랫동안 울었던 거 같다.
어렸을 때 형과 나는 붓글씨를 배웠었는데 시골에 갈 때 잘 적은 몇 장을 뽑아 할아버지께 보여 드리곤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안경을 끼고 보시면서 흐뭇해하시며 잘 썼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시골에 사는 사촌 동생과 자전거를 서로 탈거라고 다툴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오빠는 곧 집에 가니까 오빠에게 양보해줘'라고 말씀하시며 나의 손을 들어주시곤 했다. 차례를 지내는 당일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하얀 한복 바지와 보라색 저고리를 차려입으시고 정성껏 조상님들께 올릴 상을 준비하셨고 차례를 지내고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한 다음에는 티브이 앞에 앉아 씨름을 즐겨 보시곤 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항암 치료로 머리가 다 빠져버렸고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채 사경을 헤매셨다. 병원에서는 어렵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할 때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달려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펑펑 울었더랬다.
명절 때 할아버지 영정 사진을 가만히 보니 사진 속 깊게 파인 주름과 하얀 머리카락의 할아버지는 여전하시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여오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 저녁 농사일을 마치고 창고 앞 오래된 의자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결혼까지는 아니더래도 군대 제대하는 모습은 보셨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 평균 수명 80세를 넘겼지만 할아버지는 10년이나 더 일찍 돌아가신 게 된다. 오래 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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