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전무님이 잠깐 회의실로 부르신다. 무슨 일일까 무척 궁금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개인적으로 불러 얘기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얘기는 이러했다. 전무님 와이프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우리 회사의 거래처 중 한 곳인데 그 업체에 많은 일거리를 주고 있다. 그런데 이제 적을 두고 있는 회사에서 독립해서 나와 직접 새로운 회사를 차리니 이전과 동일하게 많이 도와 달라는 얘기였다. 물론 속마음과는 다르게 습관적으로 "네네, 축하드립니다."하고 대답했다. 머지않아 이 업체랑 회식 한 번 하겠네 속으로 생각하며.
며칠 지나자 네이트온 단체 메시지가 온다. 오는 화요일 그 업체와 저녁 예정이어니 시간 비워 둬라는 과장의 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 퇴사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이런 회식까지 겹치니 머리를 지어 뜯게 된다. 책상 위 모니터로는 보는 눈이 많아 감히 적지 못하고 핸드폰을 이용해 녹색창에 '회식 변명거리'라고 입력해 보았다. 이 시대의 회식은 필요악임이 분명하다. 같은 이유로 고민하고 있는 동지들이 많다. '그냥 쿨하게 가기 싫다고 얘기해라.'부터 '선을 본다고 해라.', '생리통이 심하다고 해라.' (참고로 난 남자다.) 등의 조언이 있었지만 윗분들의 의문과 질문을 한방에 잠재워줄 그런 참신한 변명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한 친구는 약간의 연기가 필요하고 배고픔을 참아야 하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이라며 알려 준 것이 있는데 '장염'에 걸린 척하라는 것이었다. 출근과 동시에 책상에 약봉지 하나를 올려놓고 책상에 엎드려 몸이 좋지 않음을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점심은 과감히 패스해야 한다고 했다. 틈틈이 배를 잡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잊지 마라고 덧 붙였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점심을 안 먹고 오후 6시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계속 있다가는 회식에 끌려갈게 뻔했고 단호한 결정이 필요했다. 나는 과장에게 '어머니가 몸이 편찮으셔서 입원을 하시는데 그 날이 회식 날이다. 그래서 회식 참석이 어려울 거 같다.'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답장이 왔다. '많이 안 좋으신 거야?' 나는 '심각한 건 아니고 어깨가 안 좋아서 수술하게 되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실제 어머니의 어깨 상태는 좋지 않고 수술을 권유 받았지만 시간이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였고 그럴싸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아프게 한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군대에선 실무에 배치되자마자 제주도로 훈련을 떠난 관계로 남들 다가는 100일 휴가 (위로 휴가) 타이밍을 놓쳐 못 가게 되었다. 그때 집에 부탁하여 친할머니께서 오늘내일하는 위독한 상태로 마지막으로 손자를 보고 싶어 하신다라고 부대에 전화를 넣어달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2박 3일 휴가를 쟁취한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기분이 머릿속을 맴돈다. 회식이 뭐길래 이런 떳떳하지 못한 변명을 늘어놓아야지만 안 갈 수 있는 건지. 누구를 위한 회식이라는 말인가? 그쪽에서는 '많이 좀 도와주세요.'하고 나올게 뻔했고 '네네'하며 무성의하게 답하는 게 다일 텐데. 그리고 이 회식은 어디까지나 전무님과 그 와이프만 좋은 일 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몇몇 싹수없는 것들은 내가 니 아픈 곳은 안다는 것처럼 말할 거리가 떨어지면 관심도 없으면서 '결혼 안 해요?', ' 여자 친구는?' 하고 물어오기도 한다. 마음 같아서는 무표정으로 '왜요? 관심 있어요?' 또는 '신경 끄시고 본인이나 잘하세요.' 하고 대답하고 싶지만 상대가 나보다 직급이 높을 수도 있고 내가 너무 오버해서 흥분하면 내가 속 좁은 사람이 되고 마니까 정말 진퇴양난이다. 무슨 결혼한 게 벼슬인 줄 아나보다. '바보들아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한 거거든?'
어쨌든 거지 같은 회식을 안 가고 이 글을 적고 있으니 반은 성공한 거다. 내일 출근을 하면 몇몇 동료는 숙취로 점심은 콩나물 해장국을 먹겠구나. 어느 누구는 어제 오고 갔던 얘기를 여기저기 나른다고 입을 쉬지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구는 '어머니 경과는 어떠냐?', '괜찮아지셨냐?'하는 소울 없는 멘트를 날리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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